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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삼국시대의 종말에는 삼국통일도 통일신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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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johnyshim 작성일25-02-22 10:10 조회2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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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산책] 삼국시대의 종말에는 삼국통일도 통일신라도 없다 • 이형모 이사장 • 입력 2024.12.09 11:18 SNS 기사보내기 카카오톡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 인쇄 본문 글씨 키우기 가 본문 글씨 줄이기 이형모 재외동포연구원 이사장 안시성 전투 이후 백제의 패망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양만춘이 쏜 화살에 맞아 그 후유증으로 649년 4월에 죽었다. 당 태종의 아들 당 고종(이치)과 이적, 소정방 등은 복수하고 싶었으나, 연개소문이 두려워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고구려의 침벌만 받고 감히 군사를 보내지 못했다. 654년 신라 진덕여왕이 죽고, 김춘추가 왕위를 이으니 29대 태종무열왕이다. 이때 백제는 상좌평 부여성충, 중국 월주(양자강)주둔군사령관 부여윤충, 가잠성주 계백, 의직 등 어진 재상과 명장들이 숲처럼 많았고, 병사들은 잘 훈련된 백전의 용사들이어서 신라는 백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에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은 백제가 스스로 무너지게 할 계략을 비밀하게 진행했다. 신라 부산현 현령 조미곤이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의 집 종이 되어 신뢰를 얻게 되자, 조미곤이 김유신의 말을 임자에게 전해 “신라, 백제의 승패 간에 임자와 김유신의 부귀영화를 상호 보장하기로 약조”하고, 마침내 좌평 임자가 무녀(巫女) 금화(錦花)를 ‘국가 운명과 길흉화복을 아는 선녀’라고 천거하여 백제 왕궁에 들여보내고, 임자는 금화와 손잡고 의자왕을 미혹하여 상좌평 부여성충, 장군 부여윤충 이하 유능한 신하들을 살해하거나 쫓아내게 하여 백제로써 백제를 망하게 함에 이르렀다. 657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고, 맏아들 남생이 막리지와 3군대장군이 되었다. 658년 당(唐)의 정명진, 설인귀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대패하고 돌아갔다. 660년 6월에는 김유신과 소정방이 13만 신당연합군으로 백제를 침공했고, 상좌평 부여성충과 장군 부여윤충 등 충신들을 스스로 제거한 의자왕의 백제는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했다. 고구려 대막리지 남생은 동맹국 백제에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했다. 김유신의 대당(唐) 전략 제안과 태종(김춘추)의 마지막 선택 660년 7월 의자왕이 항복했을 때, 신라 태종(김춘추)이 당(唐)의 소정방에게 감사 인사를 하러 금돌성(今突城: 음성)에서 솝울(所夫里: 백제 수도)로 달려와 보니, 소정방이 “일찍 백제를 쳐 없애거든 기회를 보아 신라를 쳐서 빼앗으라.”는 당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았기 때문에 신라의 빈틈을 엿보고 있었다. 김유신이 당 고종의 속셈을 파악하고 태종에게 보고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대항책을 강구하였는데, 김다미(金多美)가 말했다. “신라 병사에게 백제 병사의 옷을 입혀 당나라 진영을 치게 하면 우리 군영에 구원을 요청해올 것입니다. 그 때 불의(不意)를 틈타 습격해 당나라 군사를 깨뜨리고 백제 전토를 수복한 후에, 북으로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당(唐)과 대항하며, 백성을 위무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면 누가 신라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태종이 말했다. “이미 당의 은혜를 입어서 적국을 멸망시키고 그리고 또 당을 친다면 하늘이 어찌 우리를 도와주겠느냐.” 당나라가 안시성 전투이후 국력이 약해져 신라의 협조 없이는 고구려를 공격할 힘이 모자라는 정황을 파악한 김유신은, 신라군이 소정방의 군대를 공격하면 궤멸시킬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개의 꼬리를 밟으면 주인이라도 뭅니다. 지금 당은 우리의 주인도 아니면서 우리의 꼬리를 밟을 뿐만 아니라 곧 우리의 머리까지 깨려고 하니, 어찌 그 은혜를 생각 하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당(唐)을 치기를 한사코 권했으나 태종무열왕이 결국 듣지 않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방비만 엄히 하도록 했다. 소정방이 신라에서 경비하고 있음을 알고 신라군 공격 음모를 중지하였다. 신당연합군의 고구려 침공 662년, 당 고종은 임아상, 걸필하력, 소정방, 설인귀, 방효태 등 여러 장수들을 35개 방면으로 보내고, 하남, 하북, 회남 67주에서 4만 4천의 병력을 증발하여 평양으로 쳐들어가고, 낭장 유덕민은 신라로 들어가 신라병과 함께 고구려 남쪽 경계를 침입하면서 신라의 양곡을 평양으로 운반케 했다. 이때 신라의 태종무열왕(金春秋)이 죽어서 상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무왕(金法敏)은 김유신, 김인문, 김량도 등 9명의 장군으로 군사를 총동원해 큰 수레 20량으로 쌀 4천 섬, 벼 2만 2천 섬을 평양의 당나라 군사에게 보내려 했으나, 태산(兌山: 금산)과 우술성(雨述城: 회덕)에서 백제 의병들이 길을 막았다. 서로 대치한 지 수십일 만에 성 안에 있던 백제 의병들 수천 명이 전사하고 성도 함락되어 웅진으로 양곡을 운반할 길이 뚫렸다. 한편 평양의 당나라 군사들은 고구려 군사에게 대패하여 패강도총관 임아상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죽고, 옥저도총관 방효태는 자기 아들 13명과 함께 사수(蛇水: 보통강) 싸움에서 패하여 전군이 몰살당하고, 소정방 등 각 군은 한시성(韓始城: 평양 부근 西施村)에서 버티고 있었다. 신라 대장군 김유신이 군사를 독려해 칠중하를 건너고 험한 산을 넘어 쌀을 운반하여 수십일 만에 평양에 이르러 소정방에게 양식 쌀을 전달하니, 소정방의 군사들은 한번 실컷 배불리 먹고 나서는 더 싸울 수 없다고 바다를 따라 당으로 돌아가 버렸다. 김유신의 신라 군사들은 평양에서 신라로 돌아가는 길에 추위와 기아로 죽고, 고구려 군사와 백제 의병들의 포위 공격을 받아 살아서 돌아간 자는 1백 명 중에 하나도 되지 않았다. 666년, 연전연승하던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투쟁으로 남건, 남산이 권력을 잡자 대막리지 남생은 당나라로 도망해 고구려 침공의 길잡이가 되었고,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남쪽 12개 성을 가지고 신라로 귀순했다. 667년 9월, 당(唐)이 대군을 보내 신성 근처의 16개 성이 함락됐고, 그 후 요동지역 부여성과 주변 40여 성이 함락됐다. 668년 9월에는 하평양이 함락되어 고구려 보장왕이 항복하고 고구려 700년 역사는 종지부를 찍었다. 당 고종은 보장왕과 남건, 남산을 포함한 고구려 사람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고 고구려 땅은 모두 당나라가 차지했다. 삼국시대의 종말에는 삼국통일도 통일신라도 없다 668년, 신라 문무왕 8년, 삼국시대는 막을 내렸다. 강성한 고구려와 백제는 내부분열로 스스로 자멸하고, 약한 신라는 내부단결을 강화하고 당과 연합해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삼국통일도 없고 통일신라도 없었다. 백제가 망한 이후, 신라는 당(唐)군과 싸워 대동강 이남의 백제 땅을 차지해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신라가 당나라와 손잡고 고구려와 백제를 망하게 했으나, 신라마저 정복하려고 의도한 당 고종과 싸워 대동강 이남을 차지하고 살아남았으니 그나마 한민족의 나라를 이을 수 있게 되었다. 698년, 고구려 유민들은 ‘후고구려’의 깃발을 들고 대조영을 중심으로 뭉쳐 대진국(발해)을 세우고 당(唐)과 싸워 고구려의 옛 강역을 되찾고, 228년간 신라와 더불어 ‘남북조 시대’를 이루었다가 926년에 거란에게 패망한다. 기원 918년에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워 고구려의 명맥을 잇게 된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통합해내지 못한 신라 왕조 말기는 후삼국 시대로 분열된다. 이윽고 후삼국 삼한을 통일한 태조 왕건에게 고구려, 백제, 신라 유민들을 통합하는 실질적 삼한일통(三韓一統: 한민족 통합)이 국가적 과업으로 넘겨진다. 연개소문의 꿈, 당 태종의 꿈 중국과 대등한 고구려를 용납할 수 없었던 수 문제와 수 양제가 4차례 침공해서 고구려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에게 완패하고 618년 수나라는 패망했다. 수나라의 패배를 중국의 수치라고 생각한 당 태종은 고구려를 굴복시키고자 20여년을 준비하고 645년 국력을 기울여 침공했으나 안시성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해 간신히 살아서 돌아갔다. 그는 649년 죽을 때 유언의 조서(遺詔)로써 고구려와의 요동전쟁을 그만두라고 명했다. 연개소문이 비록 ‘중국을 고구려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필생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당 태종과 피차 국운을 건 안시성 전투에서 이김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고 얻을 것이 없다는 교훈”을 중국의 후세들에게 남겼다.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의 생애를 기리며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더했다. “우리 조선의 수천 년 역사에서 ‘역사상 진화(進化)의 의미를 가진 대변혁’으로서 혁명을 구하자면 몇 개 되지 못할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건세습의 ‘호족공치제(豪族共治制)’를 타파하여 분립의 대국을 통일로 돌리는 동시에, 쳐들어온 당 태종을 격파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깊이 추격하여 중국 전국을 벌벌 떨게 하였으니, 혁명가의 기백만 가졌을 뿐 아니라 재주와 지략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죽을 때에 따로 어진 인재를 세워서 조선인 만대의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불초자 형제에게 대권을 맡겨서 마침내 이미 이루어놓은 공업(功業)마저 뒤엎어 버렸으니, 대개 그는 야심은 많았으나 공덕(公德: 공공을 위하는 도덕적 의리)은 작았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서울에서는 마을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고무줄을 넘으면서 노래했다.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돌아가시자/ 나라가 망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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