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1월 23일 목요일 아침, 몽골 대학 캠퍼스의 “한국문학 작품 번역 강의”를 위해, 주몽골 중국 대사관 근처를 지나노라니 눈발이 휘날렸습니다. 하여, 이 날 강의에서 저는 우리나라 여류 시인 김남조 여사(1927. 09. 26 ~ 현재 90세로 생존)의 1967년 작품인 “설일(雪日)”을 뽑아 들었습니다.
주지하시다시피,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지금도 실려 있는지는 제 알 바 아니고요), 이 시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날의 눈 내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해서, ‘1. 신의 존재를 느끼며=>2. 외로움을 극복하고=>3. 긍정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시인 자신의 다짐이, 여성 특유의 감수성(感受性)으로, 잔잔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설일(雪日) // 김남조 // 겨울 나무와 / 바람 /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 나무도 바람도 / 혼자가 아닌 게 된다 // 혼자는 아니다 /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 나도 아니다 /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 삶은 언제나 /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 사랑도 매양 /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 말없이 삭이고 /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 황송한 축연이라 알고 / 한 세상을 누리자 // 새해의 눈시울이 / 순수의 얼음꽃, /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는 / 백설을 담고 온다 // <김남조 시집>(1967)
강의는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애제자들은, 강의실에서 평소 배웠던 낱말들과는 다른, 다소 생소한, “은총의 돌층계, 섭리의 자갈밭” 같은 낱말들로 힘들어 하는 게 역력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목소리를 최대한 깔고 점잖게 물었습니다. “마지막 연의 ‘담고 온다’로 끝나는 문장에서 주어와 목적어를 찾아 봐라!”
애제자들이 더욱 헤매기 시작합니다. “삽입된 낱말들을 다 빼버리고 요점만 추리면, “(새해의) 눈시울이 백설을 담고 온다”이므로 ‘눈시울’이 주어, ‘백설’이 목적어이다. ‘눈물’과 ‘떨구다’는 ‘백설’을 꾸며 주는 낱말들이므로 주어와 본 동사가 될 수 없다! 알겠느냐? 이 말은 ‘새해가 눈이 내리면서 시작됐다는 의미이다!”
몽골 현지에는 곧 11월이 마감되고, 12월이 들이닥칠 겁니다. 하여, 12월 한 달 동안, 몽골한인회, 몽골한인상공회의소, 몽골한인외식업협회 등 각종 한인 단체들의 송년회가 줄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새 느낌으로 무엇인가의 결사적 실행을 다짐해 보지만, 그 귀한 시간들을 결국에는 허투루 써버리고 연말에 번번이 후회하는 이 버릇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할 듯합니다. 이렇게 2017년이 흘러가고야 마는군요.